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오와급 전함 (문단 편집) === [[미주리(전함)|BB-63 USS 미주리(Missouri)]] === ||<-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ssouri_Modernized.jpg|width=100%]] || || 건조 || 1941년 1월 6일 || 진수 || 1944년 1월 29일 || 취역 || 1944년 6월 11일 || || 퇴역 || 1992년 3월 31일 2차 퇴역 || 제적 || 1995년 1월 12일 || 전시 || [[하와이]] 주 [[진주만]] || [youtube(vj-15O-BTDw)] Big Guns - Battleship USS Missouri Shock & Awe [youtube(46BmLBuBcF0)] Battleship Missouri Memorial [youtube(2piJQYJdYCQ)] 3번함인 USS 미주리 함은 1942년 11월 당시 [[윌리엄 홀시|과달카날에서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를 외친 제독]]의 기함이고, 그 한쪽 갑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항복한 장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missouriplaque_RCG.jpg]] 일본측 대표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에서 행사 참여 중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의거]]로 한쪽 다리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외상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장소 당시 전쟁에서 그다지 활약하지도 않은 미주리에서 항복식전이 열리는 데에 반대하면서 전쟁에서 활약한 무훈함에서 식전을 열자는 의견도 상당히 있었다. 이를테면 과달카날에서 활약한 USS 워싱턴 함이라든지 미 전함 중 가장 많은 작전에 참가한 USS 노스 캐롤라이나 함 등.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가 빠진 이유는 당시 [[카미카제]] 특공대에게 공격받아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굳이 미주리가 아니라도 충분히 전적을 쌓은 배가 많은데 굳이 미주리를 채택해야 했을지는 의문. 사실 원래 전훈이나 위상은 44년초 [[헤일스톤 작전]] 부터 트러크 제도, 사이판, 티니안의 일본군 머리에 신나게 16인치 불지옥을 선사하며 [[레이테 만 해전]], [[필리핀 해 해전]] 깉은 1944년의 함대결전급 해전에서 맹활약했으며, [[미합중국 해군]] [[제3함대]]와 [[윌리엄 홀시]]의 기함이었던 언니 뉴저지가 맞아야 마땅했지만 당시 뉴저지 포함한 3함대 전체가 동년 12월 [[태풍]] 코브라에 박살이 나서 이 시점에선 웬만한 일본군 공격 따위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인(...) 구축함 3척 침몰, 항모 갑판 비행기 수십대 파괴, 전함, 순양함 중파에 790명 사망이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미주리가 땜빵으로 투입된 것이다.[* 다만 태풍 코브라로 인해 3함대가 개박살났지만 그래도 당대 최신형 전함의 위용이 어디가는건 아니라 뉴저지는 비교적 멀쩡했다. 태풍으로 인해 뉴저지가 재껴지고 미주리가 대신 선택됐다는 건 뉴저지 박물관함 보존회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도 있다.] 어쨌든 미주리가 최종적으로 선택되었고 다른 전함의 승조원들은 [[트루먼]]의 고향이 미주리라서 그런 것이라고 불평했다. 굳이 항복 조인식을 해군 함정에서 한 이유는 미국 해군이 주축이 된 전장이었음에도 전후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GHQ]]의 수장으로 육군 원수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제치고 선출되는 등[* 항복 조인식에서도 연합군 대표 서명은 맥아더 장군이 했지만 그 대신인지 니미츠 제독 또한 미합중국군 대표로 서명했다.] 해군의 주목도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무마하기 위함이었다.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niitsiksuN1t3n5zjo1_1280.jpg]] 1945년 4월 11일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주리로 돌진하는 카미카제용 [[A6M]]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으로 USS 벙커힐과 함께 [[카미카제]] 공격의 사례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 장면 직후 [[A6M]]은 충돌했고 항공유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참고로 이 사진은 당시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제빵사가 찍은 것이다. 카미카제 조종사는 카노야 항공기지에서 출격한 제5 겐부대의 이시노 세츠오 이등병조로 판명되었으며 이후 시신은 수습되었고 미군은 장례를 치렀다. [[파일:external/14544-presscdn-0-64.pagely.netdna-cdn.com/missouri_firing_in_korea.jpg]] [[한국전쟁]]에서 [[화력지원]] 중인 미주리 한국전쟁에도 참여하여 화력지원을 실시했다. 16인치 포탄의 막강한 위력이 인상적이어서 북한군이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과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일화에서도 등장한다. 당시 미주리를 비롯한 [[알레이 버크]]의 함대는 [[백선엽]]의 1군단에게 화력 지원을 해주었는데, 백선엽은 이 화력에 매우 만족해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에게 알레이 버크를 "본관의 포병 사령관입니다"하고 소개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다만 알레이 버크는 임무이니까 한 것일 뿐 좀 마뜩찮아 했단다. 전함 주포탄 값도 만만찮은데다 가치가 높은 전함을 적 해안선에 접근시키기는 것도 부담되었기 때문이다. 여튼 전쟁 내내 동해상에서 신나게 포를 날려댔기 때문에 동해안을 따라가는 함경남도/함경북도 주간선 보급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고 전쟁 내내 복구되지 못했다. 이는 [[평라선]](함경선) 철도가 복구되면서 산굼부리 안으로 터널 파고 꾸역꾸역 들어가게 된 원인이자 북한이 찢어지는 살림에도 만포에서 혜산으로 넘어가는 [[북부철길]]을 뚫게 되는 원인이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몇 년간 현역으로 있다가 퇴역했다. 1984년에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한 600척 함대 구상에 따라 현역으로 복귀, 1991년에는 자매함 위스콘신과 걸프 전쟁에 참전했다. 미주리는 1월 17일에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 2월에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미주리 쪽으로 이라크군이 대함미사일 2발을 발사했는데 한 발은 채프에 낚여서 바다로 낙하했고 또 다른 한발은 영국 해군 구축함이 발사한 미사일에 요격되었다. 미주리는 토마호크 미사일 28발을 발사했고 16인치 포탄 783발을 발사, 위스콘신은 토마호크 미사일 24발을 발사했으며 16인치 포탄 319발, 5인치 포탄 881발을 발사했다고 한다. 더불어 2차 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수상기들이 한 역할을 무인기로 대체하여 무인기도 운용했다고 한다. 이 무인기들은 함내에서 조종하여 미주리의 눈 역할을 수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탄착관측사격을 시행했다. 그리고 위스콘신이 처음으로 무인기를 통해서 적의 항복을 받아내는 경험을 했다. 그야말로 신구의 조합이 이루어졌나 싶기도 한데 결국 종전 후 퇴역을 피할 수 없었다. 퇴역 후에는 [[진주만 공습]] 당시 격침된 USS 아리조나 기념관 맞은 편에 기념함으로 정박하여, [[태평양 전쟁]]의 시작과 끝을 한 장소에서 보여주고 있다. || [[파일:미주리기념관.jpg|width=100%]] || || 현재의 미주리, 미주리 함 앞쪽의 하얀 건물은 애리조나 기념관이며 건물을 떠받친 철 구조물이 바로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2번함 USS 애리조나의 선체이다. || 미주리 박물관이 위치한 곳의 도로명들은 미 해군 항모들의 이름을 따와서 지었기에 새러토가, 와스프, 갬비어베이, 바탄 등 군사무기 매니아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한가득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